RPG의 역사: 테이블탑에서 JRPG·서양 RPG·MMORPG까지
1974년 던전스 앤 드래곤스에서 시작해 울티마·위저드리, 드래곤 퀘스트·파이널 판타지, 디아블로·발더스 게이트, 리니지·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로 이어진 RPG 장르의 흐름과 설계 특징을 정리합니다.
RPG(롤플레잉 게임)는 비디오 게임에서 가장 오래되고 넓은 장르 가운데 하나입니다. 종이와 주사위로 하던 탁상 게임이 대학 컴퓨터로 옮겨 갔고, 그 뒤 일본의 가정용 게임기와 미국의 PC, 그리고 인터넷을 거치며 서로 다른 갈래로 자랐습니다.
이 글에서는 RPG가 무엇인지부터 시작해, 1970년대 테이블탑 RPG와 메인프레임 게임, 1980년대 울티마와 위저드리, 일본에서 생겨난 JRPG, 1990년대 후반 서양 RPG의 부활, 그리고 수많은 사람이 한 세계에 모이는 MMORPG까지 시대 순서대로 살펴봅니다. 마지막에는 장르를 이루는 설계 요소와 오늘날의 모습도 정리합니다.
RPG란 무엇이고 어디서 왔나
RPG는 플레이어가 한 인물이나 파티의 역할을 맡아, 이야기가 있는 세계를 탐험하며 성장하는 게임을 말합니다. 대부분 경험치와 레벨, 능력치, 장비, 퀘스트 같은 요소를 갖추고 있고, 전투 결과가 플레이어의 손놀림보다 캐릭터의 수치에 크게 좌우된다는 점이 다른 장르와 구별되는 특징입니다.
장르의 뿌리는 탁상(테이블탑) 롤플레잉 게임입니다. 1974년 게리 가이각스와 데이브 안슨이 만든 『던전스 앤 드래곤스(D&D)』가 출간되면서, 진행자(던전 마스터)가 이야기를 풀고 참가자가 캐릭터를 연기하며 주사위로 행동의 성패를 정하는 방식이 널리 퍼졌습니다. J. R. R. 톨킨의 『반지의 제왕』 같은 판타지 소설도 초기 RPG의 세계관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 놀이는 곧 컴퓨터로 옮겨졌습니다. 1970년대 중반 미국 대학의 메인프레임과 PLATO 시스템에서 『pedit5』, 『dnd』(1975) 같은 게임이 만들어졌고, 돈 대글로우는 1975년 『Dungeon』을 만들었습니다. 1980년에는 버클리의 학생들이 유닉스용 『로그(Rogue)』를 만들었는데, 문자로 그린 지도와 매번 새로 생성되는 던전은 훗날 '로그라이크'라는 하위 장르의 이름이 됩니다.
1980년대: 울티마와 위저드리가 만든 틀
가정용 컴퓨터가 보급되면서 RPG는 상업 제품이 되었습니다. 이 시기의 두 기둥은 리처드 개리엇의 『울티마』 시리즈와 사이테크(Sir-Tech)의 『위저드리』 시리즈입니다. 두 시리즈 모두 1981년 애플 II로 시작했습니다.
- 위저드리: 1인칭 시점으로 던전을 탐험하고, 여러 명으로 구성된 파티가 차례로 행동하며 싸우는 구조를 보여 주었습니다. 플레이어가 직접 모눈종이에 지도를 그리게 만드는 높은 난이도로도 유명했습니다.
- 울티마: 위에서 내려다보는 타일 그래픽과 넓은 필드, 파티 전투를 갖추었습니다. 1983년 『울티마 III』는 이후 많은 RPG에 영향을 주었고, 1985년 『울티마 IV』는 괴물을 쓰러뜨리는 것보다 정직·연민 같은 '덕목'을 지키는 행동을 평가하는 도덕 체계를 넣어 주목받았습니다.
1980년대 후반에는 『바즈 테일』(1985), 『마이트 앤 매직』(1986), D&D 공식 규칙을 옮긴 SSI의 『풀 오브 레디언스』(1988) 같은 작품이 이어졌습니다. 마우스로 사물을 직접 조작하는 『던전 마스터』(1987)처럼 실시간 진행을 시도한 게임도 나왔습니다.
JRPG의 탄생: 드래곤 퀘스트와 파이널 판타지
일본에서는 컴퓨터가 비싸 PC RPG 시장이 크지 않았습니다. 『더 블랙 오닉스』(1984) 같은 PC 작품이 있었지만, 장르가 대중화된 계기는 가정용 게임기였습니다.
1986년 에닉스가 발매하고 춘소프트가 개발한 『드래곤 퀘스트』는 호리이 유지가 기획했고, 울티마와 위저드리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패미컴의 적은 메모리와 단순한 컨트롤러에 맞추기 위해 조작과 시스템을 크게 단순화했는데, 이 결과가 오히려 처음 RPG를 접하는 사람에게 잘 맞았습니다. 드래곤 퀘스트는 이후 일본 RPG의 기본 형태로 자리 잡았습니다.
1987년에는 스퀘어가 사카구치 히로노부를 중심으로 『파이널 판타지』를 내놓았습니다. 아군을 화면 오른쪽, 적을 왼쪽에 두는 옆에서 본 전투 화면은 이후 많은 콘솔 RPG의 표준이 되었습니다. 1990년대에는 『크로노 트리거』(1995), 『포켓몬스터 적·녹』(1996) 같은 작품이 이어졌고, 1997년 플레이스테이션용 『파이널 판타지 VII』는 3D 그래픽과 영상 연출로 JRPG를 세계 시장에 크게 알렸습니다.
JRPG는 정해진 주인공과 줄거리를 따라가는 서사, 턴제 전투, 개성 있는 캐릭터와 애니메이션풍 그림체를 특징으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만 사카구치 히로노부도 지적했듯이 지역에 따른 구분에 들어맞지 않는 작품도 많기 때문에, 이 구분은 경향 정도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서양 RPG의 부활과 액션 RPG
1990년대 중반 서양 PC RPG는 침체기를 겪었습니다. CD-ROM과 그래픽 발전으로 개발비와 기간이 늘었고, 플레이어의 관심이 FPS와 실시간 전략 게임으로 옮겨 갔기 때문입니다.
분위기를 바꾼 것은 1996년 12월 31일 블리자드가 발매한 『디아블로』입니다. 로그라이크처럼 무작위로 생성되는 던전에 빠른 실시간 전투를 더했고, 배틀넷을 통한 온라인 협동 플레이를 지원했습니다. 이후 '싸우고, 아이템을 줍고, 레벨을 올리는' 반복 구조의 액션 RPG가 많이 만들어졌습니다.
같은 시기 이야기와 선택을 중시하는 작품도 나왔습니다. 인터플레이의 『폴아웃』(1997), 바이오웨어의 『발더스 게이트』(1998), 워런 스펙터가 이끈 이온 스톰의 『데우스 엑스』(2000)는 여러 해결 방법과 대화 선택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베데스다의 『엘더 스크롤』 시리즈는 『모로윈드』(2002), 『오블리비언』(2006), 『스카이림』(2011)으로 이어지며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오픈 월드 RPG를 대표하게 되었고, 바이오웨어의 『매스 이펙트』(2007), CD 프로젝트 레드의 『위쳐 3: 와일드 헌트』(2015)도 장르의 대표작으로 꼽힙니다.
MMORPG: 수많은 사람이 한 세계에서
RPG의 또 다른 갈래는 온라인입니다. 1970~80년대 대학 네트워크에서 여러 사람이 글자로 함께 모험하던 MUD(Multi-User Dungeon)가 있었고, 인터넷이 보급되자 이것이 그래픽을 갖춘 MMORPG(대규모 다중 사용자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로 발전했습니다.
| 연도 | 게임 | 개발사 | 의미 |
|---|---|---|---|
| 1996 | 바람의 나라 | 넥슨 | 한국 초기 그래픽 온라인 RPG |
| 1997 | 울티마 온라인 | 오리진 시스템스 | 울티마 세계를 온라인으로 확장 |
| 1998 | 리니지 | 엔씨소프트 | 공성전 등 대규모 이용자 간 경쟁 |
| 1999 | 에버퀘스트 | 버런트 인터랙티브 | 3D 그래픽 MMORPG의 대중화 |
| 2004 |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 블리자드 | 퀘스트 중심 설계로 장르의 기준이 됨 |
한국은 이 흐름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습니다. 『바람의 나라』와 『리니지』는 PC방 문화와 함께 성장했고, 이후 한국 게임 산업이 온라인 게임을 중심으로 커지는 바탕이 되었습니다. 울티마를 만든 리처드 개리엇도 훗날 엔씨소프트와 함께 일했습니다.
시대별 대표작 한눈에 보기
| 연도 | 게임 | 개발사 | 의의 |
|---|---|---|---|
| 1974 | 던전스 앤 드래곤스 | TSR | 테이블탑 RPG의 출발점 |
| 1980 | 로그 | 대학생 개발자 | 무작위 던전, 로그라이크의 원형 |
| 1981 | 위저드리 | 사이테크 | 1인칭 던전 탐험과 파티 전투 |
| 1985 | 울티마 IV | 오리진 시스템스 | 도덕과 덕목을 평가하는 설계 |
| 1986 | 드래곤 퀘스트 | 춘소프트(발매 에닉스) | 콘솔 RPG의 기본형 |
| 1987 | 파이널 판타지 | 스퀘어 | 옆에서 본 전투 화면 정착 |
| 1996 | 디아블로 | 블리자드 | 액션 RPG와 온라인 협동 |
| 1997 | 파이널 판타지 VII | 스퀘어 | 3D 연출로 JRPG의 세계화 |
| 1998 | 발더스 게이트 | 바이오웨어 | 서양 CRPG의 부활 |
| 2004 |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 블리자드 | MMORPG의 표준 |
| 2011 | 엘더 스크롤 V: 스카이림 | 베데스다 게임 스튜디오 | 오픈 월드 RPG의 대중화 |
| 2023 | 발더스 게이트 3 | 라리안 스튜디오 | 테이블탑 규칙 기반 CRPG의 재조명 |
RPG 설계의 핵심 요소
RPG를 만드는 사람들이 공통으로 다루는 요소는 크게 다섯 가지입니다.
- 성장 체계: 경험치·레벨·스킬 트리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캐릭터가 강해지는 구조입니다. 플레이어가 오래 머물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동기입니다.
- 전투 방식: 턴제, 실시간, 일시 정지가 가능한 실시간(RTwP), 시간 게이지를 쓰는 방식 등이 있습니다. 턴제는 생각할 시간을 주고, 실시간은 긴장감과 조작의 재미를 줍니다.
- 파티와 캐릭터: 한 명을 조작할지 여러 명을 꾸릴지에 따라 전략의 결이 달라집니다. 직업(클래스)과 역할 분담은 테이블탑에서 이어진 전통입니다.
- 서사와 선택: 정해진 이야기를 따라가게 할지, 대화 선택지와 결과의 분기를 줄지 정해야 합니다. 서양 RPG는 선택의 결과를, JRPG는 연출과 캐릭터 서사를 중시해 온 경향이 있습니다.
- 탐험과 보상: 지도, 숨겨진 장소, 장비와 아이템이 탐험을 이끕니다. 액션 RPG에서는 무작위 아이템이 반복 플레이의 핵심 동기가 됩니다.
RPG의 재미는 결국 "내 선택과 시간이 캐릭터와 세계에 남는다"는 감각에서 나옵니다.
오늘날의 RPG
지금은 동서양 구분이 예전보다 흐려졌습니다. 많은 게임이 RPG의 성장 요소를 빌려 오면서 액션 게임, 슈팅 게임, 전략 게임에도 레벨과 스킬 트리가 들어갑니다.
장르 안에서도 흐름이 다양합니다. 프롬소프트웨어의 『엘든 링』(2022)은 높은 난이도의 액션 전투와 넓은 오픈 월드를 결합했고, 라리안 스튜디오의 『발더스 게이트 3』(2023)는 D&D 규칙을 바탕으로 한 턴제 CRPG가 지금도 많은 사람에게 통한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모바일과 PC, 콘솔을 함께 지원하며 꾸준히 업데이트하는 서비스형 RPG도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한편 로그라이크와 그 변형인 로그라이트는 작은 팀이 만드는 인디 게임에서 자주 쓰이는 구조가 되었습니다.
종이와 주사위에서 시작한 RPG는 50년 동안 기술과 지역에 따라 모양을 바꿔 왔지만, 역할을 맡아 성장하고 세계를 탐험한다는 핵심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