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의 역사와 규칙: 초한 대결이 담긴 한국 전통 보드게임
장기는 어디에서 왔을까요? 상희라 불리던 옛 기록과 중국 샹치와의 관계, 궁·차·포·마·상·사·졸의 움직임 표, 궁성 규칙과 빅장, 기본 전략, 오늘날의 디지털 장기까지 한눈에 정리했습니다.
공원 벤치에서 어르신들이 둘러앉아 "장군!", "멍군!"을 외치는 모습은 한국에서 오래도록 익숙한 풍경입니다. 장기는 바둑과 함께 한국인이 가장 오래 즐겨 온 보드게임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지만 장기판의 '초(楚)'와 '한(漢)'이 무엇을 뜻하는지, 장기가 언제 어떻게 한반도에 자리 잡았는지는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글에서는 장기의 기원과 옛 기록, 중국 샹치와의 차이를 먼저 살펴본 뒤, 기물의 움직임과 궁성 규칙, 빅장과 점수 계산, 처음 두는 사람을 위한 기본 전략을 정리합니다. 마지막으로 오늘날 장기가 디지털로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도 소개합니다.
장기란 무엇인가
장기(將棋)는 두 사람이 각각 16개의 기물을 가지고 상대의 왕(궁)을 잡는 추상 전략 보드게임입니다. 한쪽은 붉은색의 한(漢), 다른 쪽은 푸른색(또는 녹색)의 초(楚)입니다. 이는 진나라가 무너진 뒤 천하를 놓고 다툰 한나라 유방과 초나라 항우의 '초한 전쟁'을 본뜬 것입니다. 한의 기물은 반듯한 해서체로, 초의 기물은 흘려 쓴 초서체로 글자를 새기는 것이 전통입니다.
장기판은 세로줄 9개와 가로줄 10개가 만나는 90개의 교차점으로 이루어져 있고, 기물은 칸 안이 아니라 선이 만나는 점 위에 놓습니다. 대한민국에서는 다른 나라 장기와 구분할 때 '한국장기'라고 부르며, 영어권에서는 'Korean chess'라고도 합니다.
장기의 기원: 차투랑가에서 샹치, 그리고 장기로
장기의 뿌리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습니다.
- 차투랑가 전래설: 체스, 샹치, 쇼기 등과 마찬가지로 고대 인도의 보드게임 차투랑가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설명입니다. 서양으로 간 것이 체스, 동쪽으로 간 것이 샹치와 장기라는 것입니다.
- 송나라 전래설: 중국 송나라 무렵 고려에 전해진 뒤 조금씩 바뀌어 오늘날에 이르렀다는 설입니다.
- 한사군 전래설: 한사군 시기에 한족이 들여왔다는 설도 널리 퍼져 있지만, 한국어 위키백과는 차투랑가가 6세기, 중국 전래가 8세기 무렵이라는 것이 정설이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설명합니다.
분명한 것은 장기가 중국 장기인 샹치(象棋)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점입니다. 영문 위키백과도 장기를 샹치에서 유래한 게임으로 설명합니다. 샹치는 남송 시대에 이미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추었고, 장기는 이를 바탕으로 한반도에서 고유한 규칙을 발전시켰습니다.
옛 기록 속의 장기: '상희'에서 '장기'로
조선 시대 문헌에서 장기는 처음에 '상희(象戱)'라는 이름으로 등장합니다.
| 문헌 | 내용 |
|---|---|
| 《삼국사기》 | 백제 개로왕이 '박혁(博奕)'을 즐겼다는 기록이 있으나, 여러 보드게임을 통틀어 이르는 말일 가능성이 큽니다. |
| 서거정 《필원잡기》 | 세종 때 신하 김석정과 김예몽이 상희를 두었다는 기록 |
| 《세조실록》 | 상희라는 이름으로 장기에 얽힌 이야기 수록 |
| 심수경 《견한잡록》 | 중종 무렵 문신의 기록으로, 여기서 비로소 '장기'라는 말이 나옵니다. |
| 장유 《계곡집》 '상희지' | 장기판의 길, 기물의 역할과 행마, 승부와 빅까지 이론을 자세히 서술 |
《견한잡록》에는 장기에 차·포·마·상·사·졸을 쓰고, 나무를 깎아 글자를 새기고 색을 칠한다는 설명이 나옵니다. 《어우야담》에는 종실 서천령이 장기의 명수로 소개되어 있어, 조선 시대에도 장기를 잘 두는 사람이 이름을 남길 만큼 장기가 널리 즐겨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샹치와 무엇이 다른가
장기와 샹치는 판의 크기(9×10)와 기물 구성이 거의 같지만, 실제로 두어 보면 꽤 다른 게임입니다.
- 강이 없다: 샹치판 가운데에는 양 진영을 가르는 '강'이 있지만 장기판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상이 상대 진영까지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 왕의 위치: 샹치의 장수는 맨 뒷줄 가운데에서 시작하지만, 장기의 궁은 궁성 한가운데에서 시작합니다.
- 상의 움직임: 샹치의 상은 대각선으로 두 칸 움직이지만, 장기의 상은 직선 한 칸 뒤 대각선 두 칸으로 더 멀리 갑니다.
- 포의 규칙: 장기의 포는 움직일 때도, 잡을 때도 반드시 다른 기물 하나를 넘어야 하며, 포끼리는 넘거나 잡을 수 없습니다.
- 졸의 움직임: 장기의 졸·병은 처음부터 옆으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 빅장과 한수쉼: 궁끼리 마주 보는 상황(빅장)이 샹치에서는 금지되지만, 장기에서는 무승부를 청하는 수단이 됩니다. 또 장기에서는 자기 차례를 쉬는 '한수쉼'이 허용됩니다.
- 마·상 자리 바꾸기: 장기에서는 시작 전에 마와 상의 자리를 바꿔 놓을 수 있습니다.
기물의 종류와 움직임
각자 궁 1개, 차 2개, 포 2개, 마 2개, 상 2개, 사 2개, 졸(병) 5개로 모두 16개를 가집니다. 아래 점수는 대한장기협회 기준의 점수제 대국에서 쓰는 값입니다.
| 기물 | 개수 | 움직임 | 점수 |
|---|---|---|---|
| 궁(楚·漢) | 1 | 궁성 안에서 선을 따라 한 칸. 궁성 밖으로 나갈 수 없음 | 없음 |
| 사(士) | 2 | 궁과 같이 궁성 안에서 한 칸 | 3 |
| 차(車) | 2 | 가로·세로 직선으로 원하는 만큼. 궁성 안에서는 대각선도 가능 | 13 |
| 포(包) | 2 | 다른 기물 하나를 뛰어넘어 이동·잡기. 포는 넘거나 잡을 수 없음 | 7 |
| 마(馬) | 2 | 직선 한 칸 + 대각선 한 칸. 첫 칸이 막히면 못 감 | 5 |
| 상(象) | 2 | 직선 한 칸 + 대각선 두 칸. 길이 막히면 못 감 | 3 |
| 졸·병(卒·兵) | 5 | 앞이나 옆으로 한 칸. 뒤로는 못 감. 상대 궁성 안에서는 대각선 앞으로도 가능 | 2 |
차는 가장 강한 기물이고, 포는 넘을 기물이 많은 초반에 특히 강하지만 기물이 줄어드는 후반에는 힘이 약해집니다. 졸은 끝까지 가도 다른 기물로 바뀌지 않습니다.
궁성과 판 차리기
궁성
양 진영의 가운데 아래쪽에는 가로세로 3줄, 9개 점으로 된 '궁성'이 있습니다. 궁성 안에는 X자 모양의 대각선이 그려져 있고, 궁과 사는 이 안에서만 움직입니다. 차와 포, 졸도 궁성 안에서는 대각선을 따라 움직일 수 있어서, 궁성은 공격과 방어가 가장 치열하게 부딪히는 곳입니다.
판 차리기
궁은 궁성 한가운데, 사는 궁의 양옆 뒤쪽, 차는 맨 뒷줄 양 끝에 놓습니다. 졸·병은 넷째 줄에 한 칸씩 띄워 놓고, 포는 셋째 줄 양쪽에 둡니다. 차와 사 사이의 빈자리에는 마와 상을 한 쪽에 하나씩 놓는데, 순서를 바꿀 수 있어서 네 가지 차림이 나옵니다. 상의 위치에 따라 왼상·오른상(귀마), 안상(원앙마), 바깥상(양귀마) 차림이라 부릅니다.
대국의 흐름과 승부
대국은 언제나 초가 먼저 둡니다. 예로부터 '노홍소청(老紅少靑)'이라 하여 연장자가 한(홍)을 잡는 관습이 있습니다.
- 장군과 멍군: 상대 궁을 직접 공격하는 수를 '장군', 이를 막거나 피하는 수를 '멍군'이라 합니다.
- 외통수: 장군을 불렀는데 상대가 멍군할 방법이 없으면 '외통'으로 승부가 납니다.
- 빅장: 두 궁 사이에 아무것도 없이 일직선으로 마주 보는 상태입니다. 불리한 쪽이 비김을 노려 빅장을 부르기도 하며, 대국에 따라 인정하지 않기도 합니다.
- 점수제: 공식 대회에서는 시간이 끝났을 때 남은 기물 점수로 승부를 가립니다. 나중에 두는 한에게 1.5점의 덤을 주어 시작 점수는 한 73.5점, 초 72점입니다.
"차포 떼고 둔다"는 말도 장기에서 왔습니다. 실력 차이가 클 때 잘 두는 쪽이 가장 중요한 차와 포를 빼고 두는 '접장기'에서 나온 표현입니다.
처음 두는 사람을 위한 기본 전략
- 차를 빨리 살리세요. 차는 가장 강한 기물이지만 시작할 때는 구석에 막혀 있습니다. 앞을 가로막은 졸을 옆으로 비켜 차의 길을 여는 것이 기본입니다.
- 포의 '다리'를 생각하세요. 포는 넘을 기물이 있어야 움직입니다. 상대 포 앞의 다리를 없애면 포가 묶이고, 내 포 앞에 다리를 놓으면 공격로가 생깁니다.
- 마와 상의 길목을 확인하세요. 마와 상은 가는 길에 기물이 있으면 움직이지 못합니다. 상대 마의 첫 칸을 막는 것만으로도 큰 위협을 줄일 수 있습니다.
- 사를 함부로 움직이지 마세요. 사는 궁성을 지키는 마지막 벽입니다. 사가 빠지면 차나 포의 궁성 대각선 공격에 쉽게 노출됩니다.
- 포진을 익히세요. 궁성 앞(면)에 포를 두는 '면포' 포진과 상을 두는 '면상' 포진이 기본입니다. 오늘날 쓰는 대표적인 다섯 가지 포진은 1950년대 중후반에 정립되었습니다.
오늘날의 장기와 디지털 장기
한국에서 장기는 바둑보다 대중적 인기는 덜하지만, 대한장기협회 등이 장기 보급을 맡아 명맥을 잇고 있습니다. 2009년 10월에는 중국 하얼빈에서 첫 국제 대회인 세계인 장기 대회가 열렸습니다.
최근에는 공원보다 화면에서 장기를 두는 사람이 더 많아졌습니다. 온라인 대국 사이트와 모바일 앱에서 언제든 상대를 찾을 수 있고, 오픈소스 엔진인 Fairy-Stockfish처럼 장기를 지원하는 컴퓨터 엔진도 공개되어 있습니다. 해외에서는 pychess.org 같은 사이트에서 장기를 둘 수 있어 외국인 이용자도 생겨나고 있습니다.
KEKE STUDIO의 《액션장기》는 장기를 3D로 옮겨, 기물이 맞붙을 때 병과별로 실제 전투를 벌이는 게임입니다. AI와 대국하거나 한 기기에서 두 사람이 번갈아 둘 수 있으며, 처음 10판은 무료이고 이후 900원 한 번 결제로 계속 즐길 수 있습니다(한국 구글 플레이 출시).
